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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빛과 사람과 시 0. 소리는 빛의 혀에 담지 않는 글자 사람 가까이 빚지고 사는 화폐 소리 높여 부르는 게 값인 세상에서 한몫하는 사람 입에서 쉽게 오르내리는 너 0. 빛은 몸의 기관이 내지 못하는 유일한, 고귀한 색깔 1. 쉼 없이 듣고, 보고, 말하는 인간 2. 외진 곳, 빛줄기 하나 입구는 있어도 출구가 없는 건물에 들어가 한참을 헤메며 목청껏 누굴 찾아 소리를 잃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빛은 침묵하였다 돌진하는 빛줄기에 들어오면 나갈 수 없다는 한마디도 못 건낸 채 채광이 잘 드는 창가에서 애처로운 눈빛으로 깜빡인다 깜빡이는 빛은 소리라도 내는 것 처럼 오지 말라고 3. 외진 밤 빛과 소리도 없고 꿈을 꾸지 않을 때 밤은 찾아온다 등져서가 아니라 환한 대낮에도 빛을 걸어 잠그고 잠잠히 시간에 제동을 걸며 밤이 찾아..
겨울 밤 꿈에 내 기억으로는 그저께 같지만 시간은 어제로 구분짓는 자정 너머의 밤은 왠지 마법같은 시간이 머무르는 공간이다 아래층도 위층도 아닌 그 다락방 구석진 곳 까만 스피커가 잠들어 손에서 놓은 사그라들지 않고 퍼져나가는 노래를 원주민이 모닥불 주위를 맴돌듯 따라부른다 주문을 외우듯이 저 은하수 물길이 이곳을 휘둘러 거부할 수 없는 우주에 휩싸인 시간 마법이 일어날거 같은 이 시간에 아직 노랫말이 꿈같이 들리지만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어제를 아마 엊그제를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이불 속에서 들춰본다.
선인장 카페1 의인화라고 그랬나? 그건 네가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없다는 이기적인 말을 둘러말한거겠지 기대지마 알아듣는거조차 안된다면 감정이입이랍시고 '-처럼'을 연방 들이키며 내가 네 맘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병나발 부는거 식상해 넌 감정잡고선 헤 입 벌려 침 흘리고 난 너 앞에서 잎마다 가시이빨을 드러내고 이방인의 메마른 은유를 견뎌내는 삐쭉 키 큰 선인장일뿐 너의 시에 난 인테리어 나부랭이일뿐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66페이지까지 핏줄을 삼켜버린 너는 혈관이 보일듯한 검푸른 혀를 구겨넣어 그 입술을 닫고 돌처럼 굳어버린다. 손을 뻗어 던져버리면 생명은 영원하다는 착각에 빠진 동그란 파문을 일으키며 물가로 퍼지듯 스며들다가. 이내 칼로도 도려내기 힘든 끈적끈적한 핏덩이 돌을 다시 토해내고 나는 시퍼런 나무 아래 어둠에 희미한 산책길에서 노래한다. 생명이 구불구불 맥박치는 전율을 돌처럼 동그랗게 입술을 오므려.
마음통(痛) 내 마음에 간직한 여러 색깔의 투명 상자들 이제 머리로 옮길 시간이 온걸까 아이의 마음이 빚은 색깔들 가득한 두 손 모아 바짝 들여다봐도 안에 들어있는 것도 지금껏 그 색깔인 줄 알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본 어른이 직접 두 손에 잡고선 본 그것은 다른 색깔이었고 한 번 보고나서는 옛 색깔의 아이가 가졌던 그 빛깔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뚜껑을 아무리 다시 덮어도 도저히 예전의 내 눈이 아니다
겨울 설악산 봄같이 포근했지만 눈덮인 겨울 설악산
테라로사 / 정동진
낙엽새 내가 낙엽인 것을 떨어질 때 알았다 봉오리에 누가 말을 걸지도 근처에 매캐한 불을 피우지도 않았지만 봄날의 나뭇잎들이 바람을 부대껴 안으며 내는 싱그러운 소리를 기억해 둔 나뭇가지 마디마디가 나라면 나인 나를 똑똑 불러댔다 후-, 후-, 후- 피어올렸다 봄날의 인상을 앞날에 또 기억할 나의 초상화를 타닥타닥 기억지피는 소리를 따라 의문에서 의문으로 이어지는 암흑이 달아나는 초록창문을 열고 보일 듯 말 듯 내다 보았다 빛은 어느새 열기를 머금고 침범했고 낮새 나뭇잎은 어리둥절해져 바람의 어깨에 기대다가 달빛에는 비틀거리며 어둡고 스산한 침상에 누워버렸다 여름날의 수없는 침범과 탈진에 해져 봄의 소리가 결국 보이지 않는 경계에 다다랐다 우수수- 불러내도, 기억조차 없는 가을의 목소리를 앞으로는, 기억하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