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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poem

(105)
감각의 시대 기억은 감각으로 가득차 있다 빛이 닿은 곳을 벗겨 담았고 소리가 닿은 곳을 기울여 담았고 냄새가 닿은 곳을 들여 담았고 손이 닿은 곳을 쓸어 담았고 혀가 닿은 곳을 훑어 담았다 실로 담았던 것은 거기 있었으나 내게 온 것들은 힘이며 의지였다 감각은 기억을 다시 불러 일으키고 머리는 혀를 놓아 말을 내었고 손을 놓아 맛을 보여주었고 눈은 빛은 못 내어 놓고 뭇 감각들이 뒤엉켜 녹아든 빛을 다시 주워 담아 새로운 의지를 낳았다 실로 내어 놓은 것은 거기 있었으나 가버린 것들은 힘이며 의지였다 감각을 담고 내어 놓을 수 있는 여기는 의지와 의지가 대면하지 못하는 감각의 시대이다
자전거를 타고 간 친구 내리막길 아스팔트 까만 알갱이들이 자전거 앞바퀴에 갈리며 뒤로 쏜살같이 흘러간다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빠른 바퀴 사이로 두어 바퀴 페달을 뒤로 돌리면서 내는 헛돌아가는 체인 소리를 바람에 실어 보내며 곤한 다리의 여유를 만끽한다 손잡이를 좌우로 흔들기도 하며 시원함에 흐느적거려보기도 하는데 하늘을 날고 있는 이 기분 하는 찰나에 동전은 붕 떴다가 떨어지며 뒷면이 나온다. 쏜살같이 흘러내려오는 아스팔트 까만 알갱이들... 아직까지 믿기지 않는 이 묘한 기분
사선 다리 사선 다리 태어나면 누구든지 건너가야 할 다리 하나가 자기 앞에 놓인다 내가 딛고 선 이편에서부터 아득히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삶과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는 저편을 향해 긴 사선(斜線)으로 놓여 있는 다리 그 다리는 가끔 저편을 향해 직선으로 짧게 뻗어있기도 한데 너무 짧아 때로는 이미 건너가버린 이와 이별의 슬픔마저 찾지 못해 다리 위에 서서 잠시 동동동 헤매기도 한다 그러다 여기 남은 사람들은 긴 사선을 그리며 또 다리의 높이를 서로 견주기도 하며 나만의 길을 가고 있다고 뽐내기도 하지만 결국은 모두 사선의 끝에 서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지금껏 단번에 뛰어들어 두 손과 두 다리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값 들이지 않고 건너갈 수도 있었지만 왜 굳이 코 앞에 있는 곳을 멀고 먼 긴 사선의 값비싼 다리..
도시에 사는 물 도시에 사는 물 산턱을 깎아내리고 땅을 파내고 하늘을 찌를듯한 콧대를 높이 세운다 그들이 사는 도시에 숨통이 트도록 일년 내내 싱싱함을 자랑하는 빌딩숲을 만들어낸 것이다 계절이 멈춰버린 그 숲 속에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번듯한 나무들 사이사이로 오색찬란한 물이 모여들었는데 때이른 검은 장례 물결에 화들짝 놀란다 도시에는 풍경 소리를 잃어버린 물고기의 회색비늘만이 수면 위를 수 놓으며 애도하는 물결의 방향을 조용히 알리고 있었다 처음에 만난 물결은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수줍은 말간 어린 아이의 얼굴을 내밀었지만 지금은 입을 꼭 다문채 인파 속에 파묻혀 즐거운 재잘거림도 없고 부끄러운 속삭임도 없다 푸른 라벨에 둘러싸인 페트병에 갇힌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였다는 말도 못건낸채 때이른 검은 장례 물결에 숨죽여..
반반 시계 올바로 서있는 시계마저도 위태하게 흔들리며 꾸역꾸역 밀어 처넣은 버스마냥 멀미나게 달려간다 툭...툭...툭 늦게나마 뒤따라 오는 시계는 낮밤 가리키는 네온싸인보다 못하다며 정직한 태엽을 매몰차게 밀어댄다 이미 한 두 고개 먼저 넘어와서 여기 당신 뒤에 있노라 사정하는 시계에도 지금의 시각을 째깍째깍 들이대며 시계 밥마저 아깝다고 한다 툭...툭...툭 끊김 그리고 다시 찾아드는 조임 제걸음에 맞추어 흥에 겨울 수 있지만 가슴에 남아 있는 다시 뛸 열정마저도 뽑아내 타다닥 쓰레기통에 버린다 툭...툭...툭 저마다의 걸음걸이로 세상 돌아가는 박자를 잘도 맞추련만 더러는 시간 잴 눈금 없는 자는 휘감아 버리는 둘레 모를 인생에 장님이 되어버린다 시계(視界)는 점점 좁아지고 시계(時計)는 소리 없이 더 빨라진다
손바닥 손금에 새겨진 시간의 축척으로 설익은 제 미래를 내다보는 재미도 있겠지만 바닥과 등에 갈라진 깊은 주름은 성실한 시간의 축적이며 낮은 자 인자한 얼굴, 그을린 구릿빛 인상이다
나무인생 뿌리 한 끝자락에서의 시작 그 출발은 실눈 뜨고도 어디인지 가늠하기 쉬웠다 아직 빛이 없었기에 뿌리 한 자락 부여잡고 따뜻한 어둠 속 거기 웅크려 울고 있었다 나무는 보기에 심히 아름다웠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내 잠시 지나온 저편의 날들은 지금의 나에게로 오는 유일한 한 줄기 뿌리의 운명이었다 이제 빛이 있기에 나에게는 벌려진 틈이 길이 되고 나는 까맣게 흔들리고 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땅 위 높은 곳 붉은 열매도 보이고 푸른 잎사귀도 보이고 바로 코앞에 마냥 듬직한 굵고 넓은 나무 줄기도 보인다 오가는 여린 열과 뜨거운 열병 속에 성숙한 나이테를 티 내며 소매 없는 시린 설국을 맞서보기도 한다 그리고 어렴풋이 보이는 가는 가지에 달려 있는 영근 열매와 푸른 잎을 꿈꾸며 미래의 나의 길로 ..
지상에서의 꿈 목 아래의 뜨거운 붉은 혈관은 목 위 차가운 돌부리에 때때로 어지러운 아지랑이를 피운다 멀찍이 파랗게 질려버릴 찬바람 쐬며 서 있다가도 푸른 풀섶 걷어차며 뜨거운 아랫목 찾아 들어가 아지랑이에 다시 아찔해 보기도 한다 준비할새 없이 이내 목이 내려앉아 젖혀지면 위 아래 구분 없이 차갑게 돌변한 영의 돌 조각 무덤 앞에 서고 내 존재를 줄긋던 시작과 끝은 모두 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의 조각으로 둘러 쌓인 육체는 마지막인 듯 메마른 흙먼지를 덮으며 어둠 속 말이 없는 잠을 청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영의 조각이 몸 속으로 흩어 부서지는 새벽이 오면 입을 깜빡이며 육체는 눈을 벌린다 예고 없는 육체의 끝없는 휴일일 수도 있었지만 다행인지 몰라도 아직 차가운 새벽공기를 타고 오는 흙 냄새를 맡을 수 있기에 ..